칼 럼

노인과 우대권

문석흥 2013. 11. 30. 10:19

노인과 우대권

  해를 거듭하며 나이를 먹는 것은 인식하면서도 몸이 늙는다는 것은 별로 느끼지 못하면서 지금껏 살아왔다. 아직은 아픈 데도 없고 활동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못 느끼며 지내기 때문일까?
  직장에서 정년 퇴임을 하고 나니 여가 시간이 많아 다니는 곳도 많아 졌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어울려 여행도 가고 등산도 하고 이런 저런 모임에도 참석한다. 요즘은 노인 복지 정책에 따라 많지는 않지만 교통비 보조도 나오고 지하철은 공짜로 탈 수 있는 우대권(무임권)도 주고, 열차는 30%~40% 할인도 해 준다. 고궁이나 사찰, 국립공원 입장료도 할인을 해 주거나 곳에 따라서는 무료 입장도 허용한다. 이만큼이나마 국가에서 노인들에게 복지 혜택을 베풀어 주니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가.
  나도 3, 4년 전까지는 지하철 매표소 앞에 서면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았으나 요즘은 전혀 의심받지 않고 흰색 우대권을 받는다. 이젠 내 얼굴이 바로 신분증이 된 모양이다. 그 사이 나도 모르게 늙었다는 게 아닌가. 어쨌든지 신분증 확인 과정 없이 탈 적마다 우대권을 받아 지하철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으니 볼일이 있을 때는 물론이려니와 때로는 무료한 시간 메우는 데에도 안성맞춤이다. 어쩌다 차를 잘못 타서 다시 타야 할 경우에도 차표 사는 부담이 없으니 좋고 경로석이 있으니 편안히 앉아 가서 좋다. 하지만 남들이 다 요금 내고 표를 사서 타고 다니는데 무임 승차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감도 없진 않다.
  그러잖아도 떳떳하기보다는 미안한 마음으로 늘 매표소 앞에 서는데 간혹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우대권을 던지듯 내주는 매표원의 불손한 태도를 대할 때에는 자괴지심이 든다. 가끔 노인 친구들이 모여 회식을 하고 집에 가면서 지하철역으로 내려와 매표소 앞에서 여럿이 동시에 우대권을 받다 보면 매표원의 표정은 확실히 굳어 있다. 말은 않지만 내심 얼마나 불만을 품을까, 이쯤 되면 우대권이 아니라 냉대권인 것이다.
  더러 매표소 앞에서 매표원과 노인 사이에 시비가 벌어지는 것을 본다. 실제 나이는 65세가 넘었는데 외견상 그렇게 보이지 않아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는다. 마침 신분증을 휴대하지 노인은 처음엔 사정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드디어 시비로 번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는 한 노인이 함께 가는 65세 미달 친구에게 우대권을 얻어 주고자 자신이 먼저 우대권을 한 장 받고 나서 다시 줄을 서서 우대권 한 장을 더 받으려다가 매표원에게 적발 된 경우다. 이 처럼 실수이건 고의이건 자기 과오를 인식 못하는 파렴치한 노인들도 더러 있어서, 전체 노인들의 위신을 떨어트리기도 한다.
  지하철공사도 당연히 이득을 내야 하는 사업체이기에 표 한 장이라도 공짜로 나간다는 것은 반가운 일은 아닐 게다. 노인들에게 공짜로 표를 주는 만큼 그 손해의 공백을 국가에서 메워주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당장 공짜 표를 제한 없이 내주어야 하는 매표원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현재 우리나라의 만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7%가 된다고 한다. 이 비율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적지 않다고 하는데 앞으로 계속 증가하는 추세라니 결코 간과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지하철 1호선이 금년 말 안으로 천안까지 연장 운행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그 안에 드는 지역들이 서울의 한 동(洞)처럼 되는 셈이다. 새로 지하철이 지나는 지역 노인들은 벌써부터 기대에 부풀어 있다. 서울을 멀게만 여기고 살아오던 이 지역 노인들에게는 노자(路資)도 안들이고 서울 한 복판까지 쉽게 가서,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도 하고 노인을 위한 무료 급식으로 점심도 해결하며 하루를 잘 보내고 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이렇게 되면 지하철 매표원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게다. 또 차안에서는 경로석이 부족하다 보니 앉아 있는 젊은 승객들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게다. 공짜로 타면서 남의 자리까지 빼앗는 격이 되니 노인들의 지하철 이용이 새로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을 것 같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지금의 노인들이 이바지한 공이 있는 만큼 국가나 사회로부터 응분의 예우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공짜라고 해서 할 일 없이 무료한 시간이나 메우고자 노인들이 무리지어 지하철을 무시로 이용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렇다고 노인들을 무임 승차자 대하듯 하는 불손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노인에게 주는 지하철 우대권 한 장,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다 같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짤막한 인사말 한 마디라도 주고받거나, 아니면 미소 띤 얼굴로 목례라도 보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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