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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밥에 고깃국
문석흥
2013. 11. 28. 18:20
이밥에 고깃국 요즘은 고기가 흔해서 먹고 싶을 때는 언제고 사 먹을 수 있지만, 전에는 고기 맛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선 요즘처럼 식용으로 대량 사육체제가 되지 않았다. 겨우 농가에서 일 부리기 위해서 소 한 마리나, 집안에 큰 잔치를 대비해서 먹이는 돼지 한두 마리, 닭 몇 마리 정도 키운 것 전부였으니 전 국민이 배불리 먹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나마 시중 푸줏간에서 팔던 고기는 농가에서 돈이 필요해서 내다 파는 소나 돼지를 사서 도살해 파는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값도 만만치 않아 웬만해서는 고기를 일상적으로 가정 식탁에서 먹기란 여간 부잣집 아니고서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일반 서민들도 고기를 맛볼 수 있는 날은 일 년에 네 번 정도의 기회는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설과 추석, 제사, 생일날은 요즘처럼 양념 불고기나 로스구이 같이 푸짐하게 먹을 수는 없어도 노란 기름이 방울방울 뜨고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소고깃국을 하얀 쌀밥에 말아서 먹을 수 있었다. 쌀은 왜 또 그리 귀했는지, 쌀밥 또한 가을 추수하고 동지 전 후한 무렵까지 먹고는 보릿고개를 넘기 전까지는 넉넉하게 먹지도 못했다. 6월에 보리수확이 있은 다음부터 가을 벼 추수 때까지는 내내 보리 잡곡밥을 먹어야 했다. 게다가 찬 또한 부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김치와 짜디짠 장아찌, 젓갈, 된장국이나 찌개인데 그나마 내용물도 별로 없이 강된장을 풀은 정도였다. 주식이 이렇게 궁한데 부식인 들 뭐 있었겠는가. 한껏 해야 감자나 고구마나 마당에 심은 대추, 살구, 자두, 앵두 정도 따먹을 정도였다. 식생활이 이렇다 보니 국민 건강이 좋았을 이 없다. 기생충이 많아서 해마다 학교에서는 기생충 검사를 해서 대부분이 기생충 약을 복용해야 했다. 어린 학생들의 머리에는 기계충과 이가 득실거려서 머리고 옷 속이고 하얀 DDT를 분무기로 뿌려 주었다. 그 DDT가 독성이 강한 살충제라는 것을 후에 알았다. 그리고 살찐 사람도 보기 드물었고 키도 일본 사람들보다도 작았다. 60년대 통계자료에 보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 50세 정도였다. 이런 비참했던 시절이 불과 4~50년까지 우리에게도 있었다. 북한의 김일성 수령이 생전의 목표가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 먹이는 것이었는데 그 뜻을 못 펴고 갔지만, 후계한 아들 김정일 위원장도 아직 그 꿈을 못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 어찌 보면 그 이밥의 고깃국은 이 민족의 오랜 숙원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남쪽 대한민국에서만이라도 이 숙원이 이뤄져 지금은 쌀이 남아돌아 지난날 금값 같았던 쌀값이 떨어지고 묵은 쌀도 미처 처분을 못 하고 있는 판에 당년 쌀마저 과잉 생산되어 고민이 아닌가. 60 년대에 제1차 경제 개발 계획이 수립되어 1차 산업인 농수산 정책의 추진과 함께 70년대에 요원의 불길로 상징되는 새마을 운동의 성공으로 먹는 문제가 일찍이 해결되었고 이젠 거기서 더 나아가 웰빙(찬살이)의 시대로 들어서지 않았는가. 전국 어디서나 식당이 즐비하고 소 돼지 닭 오리 등 육류도 부위별로 골라서 입맛 따라 얼마든지 사 먹는 시대가 된 것이다. 고기만 먹으면 성인병에 걸린다 하여 야채도 곁들여 먹어야 한다면서 상추나 깻잎에 고기를 쌈을 싸서까지 먹는다. 쌈이야 옛날 보리밥, 잡곡밥 먹을 시절 그 밥이 너무 거칠고 맛이 없어 쌈을 써서 먹었었는데 지금은 상추와 깻잎의 위상도 고기와 함께 높아진 것이다. 아! ‘이밥의 고깃국’, 우리는 이미 그 가난의 배고픈 한을 풀었는데 북쪽의 동포들은 아직도 국제사회로부터 식량 원조를 받으며 배를 주리고 살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