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의 변 가는 줄 모르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어느덧 실버시대를 살고 있다. 실버(silver)는 은(銀)이라는 뜻도 되고 백발 또는 은발이라는 뜻도 되어 늙어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하고 머리를 감기 위해 의자에서 내려서 내가 앉았던 의자 주변 바닥에 흩어진 하얀 머리카락들을 보면서 저 머리카락이 과연 내 머린가 하고 나도 깜짝 놀라 의심할 때도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은 머리카락이 섞여 있었거늘 어느새 검은 머리는 양지쪽에 눈 녹듯 쉽게도 사라진 것이다. 머리가 센다는 것은 검정색깔을 내는 멜라닌 색소세포가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식물의 잎은 봄여름 내내 녹색의 푸름을 간직하다가 가을이 되면 그 푸름은 사라지고 화려한 색상의 단풍으로 변한다. 이 또한 사람이 늙어 가면서 검정색의 멜라닌 색소가 빠져나가듯, 식물도 가을철은 늙음의 현상으로 녹색의 색소인 엽록소가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같은 늙음의 현상이지만 식물의 잎은 아름다운 색상의 단풍으로 변하는데 사람은 왜 볼품없는 하얀색으로 변하는 것일까? 그러기에 그 흰머리가 보기 싫어서, 아니 좀 더 젊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염색을 한다. 그러나 염색은 염색일 뿐 밑에서 자라 올라오는 머리는 여전히 흰머리이니 어쩌랴. 고려시대 우탁은 늙음을 탄식하는 내용의 탄로가(嘆老歌)를 남겼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잡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성인(聖人)이나 도인(道人)이 아니고서야 이 세상에 늙어 감을 반겨 맞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늙음은 곧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기에 두렵고 처량한 것이다. 인생은 60부터요, 70부터요, 하는 것도 억지에 불과한 말이다.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보면 철없이 뛰어 놀던 어린 시절, 하기 싫은 공부에 매달렸던 청소년 시절, 가족의 부양과 생계 그리고 출세를 위해 탐욕과 고달픔 속에 살았던 중장년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맞이하고 사는 이 실버시대는 무엇을 하고 사는 시대일까?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노는 시절이 아닌가 한다. 다만 철없이 뛰어 놀았던 어린 시절에서 철들어 겸손하고 품위 있게 노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랑하십시오.” 지난 16일, 87세로 선종하신 김수한 추기경님께서 마지막 남긴 말씀이다. 모든 실버들, 그리고 예비 실버들이 다 새겨두어야 할 말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