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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일도 기억하자

문석흥 2015. 7. 19. 16:25

휴전협정일도 기억하자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나이가 좀 높은 세대들은 광복을 8.15 해방으로 더 많이 기억 될 것이다. 이 민족이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36년간의 식민 생활의 압제에서 벗어난 날이기에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 광복의 날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단지 하나의 역사로서 배워 알고 있을 뿐 광복에 대한 특별한 느낌이야 체험한 선배 세대들보다 덜 할 것이다. 그래서인가 최근 조선일보 칼럼에서 보니 미디어리서치가 서울과 6대 광역시의 대학생 신입생에게 올해가 광복 몇 주년이 되는 해인지 알고 있나라고 물어본 결과 절반에 가까운 44%가 제대로 대답을 못 했다 한다.

   한편, 6.25 전쟁이 발발한지도 올해가 65주년이다. 3년여에 걸친 치열한 동족간의 전쟁에서 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만 남긴 채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끝난 지도 727일이면 62주년이 된다. 어찌 보면 광복도 중요하지만, 처절했던 전쟁을 일시적으로나마 종전시킨 것도 큰 의미를 갖는다. 비록 영구적이 평화협정이 아닌 휴전협정이었지만 공산화가 되지 않고 분단된 상태로라도 우리의 대한민국을 굳건히 지키게 된 것은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북한 공산군이 대구와 부산 그리고 경상도 일부 지역만 남긴 채 이외에 우리 남한 전 지역이 점령당하는 위기에 있을 때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의 유엔군이 참전으로 우리 국군과 함께 북진을 하여 평양을 함락하고 압록강과 백두산 바로 앞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맞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오산 부근까지 후퇴 하게 되었다. 이 무렵 미국과 소련 간에 휴전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당시 필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아침에 등교하면 수업은 뒤로하고 전교생이 휴전결사반대의 현수막을 앞세우고 시민과 각 단체와 함께하는 궐기대회에 참석하고 연일 거리 시위에 나섰다. 한편, 유엔군을 총 지휘하던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의 참전을 중시하며 만주에 핵무기 공격을 주장하다가 투르만 대통령에게 해임되어 환국하여 국민들로부터 전쟁영웅으로 최고의 환영을 받으며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서 연설하며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라는 명언 남겼다.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 반대와 북진통일 주장도, 전 국민의 휴전결사반대의 궐기에도 불구하고 1953723일 개성근교의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의 조인이 이뤄지고 말았다. 당시 협정의 조인은 유엔군 수석대표로 미 육군 해리슨 중장과 조선인민군 수석대표로 남일 대장이 했고 이날 오후 문산 유엔 가지 내에서 유엔군총사령관인 미 육군 클라크 대장이 확인 서명하였고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다음날 개성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수석대표로 팽덕회가 확인 서명하였다. 이로써 정전협정 조인 절차가 모두 끝나고 전 전선에서 일제히 총성이 멈췄다. 우리는 끝까지 휴전을 반대 했으며 휴전에 책임은 유엔과 마국이 저야 하기에 이 휴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만주의 폭격은 곧 3차 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투르만 대통령의 전격인 맥아더 사령관의 해임과 우리가 강력히 반대하는 가운데 휴전협정이 이뤄진 것은 통일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쳐 버린 것으로 지금도 한으로 남는다.

   지금 달력을 보면 815일은 광복절, 625일은 ‘6.25전쟁일, 727알은 유엔군참전의날로 씌어져 있을 뿐, 휴전협정의 기록은 없다. 815일 광복절과 6256.25전쟁일과 함께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뤄진 727일 휴전협정일도 기억해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