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예약 시대

문석흥 2013. 11. 30. 05:36

예약 시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처럼 일상 속에서 모든 일을 여유 있게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 가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안정되고 윤택한 삶이 되겠는가. 누구나 마음은 그렇게 먹지만 실천하기는 그다지 쉽지만은 않다.
  학창 시절, 제일 긴장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이 시험이다. 100점을 맞을 만큼의 실력을 평소에 쌓아 놓았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그날 배운 것을 그날로 집에 가서 복습해서 잊어버리지 않고 배우는 대로 다 머릿속에 저장해 두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놀기만 하다가 아무 준비 없이 시험을 맞이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선생님은 늘 숙제를 내 주며 복습과 예습을 하도록 지도를 해 주지만, 해도 형식적으로 하거나 노는데 팔려 실행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병원진료, 항공권, 열차표, 예식장, 호텔, 식당, 극장입장권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여러 분야에서 예약 문화가 자리잡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한편, 은행에 적금 저축을 한다든지, 각종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넓은 의미의 장래를 위한 예약이요, 유비무환의 실천이다.
  이렇게 예약문화가 자리 잡아가다 보니 이젠 죽은 후의 문제도 예약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매장을 하든, 화장을 하든, 옛날 같으면 공동묘지나 화장장에는 가는 즉시 입관이나 화장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불가능 해 졌다. 아무나 이용하던 공동묘지는 없어진 지 오래고 허가된 공원묘지가 있지만, 미리 사 두어야 한다. 또 근래에 와서 화장 선호도가 높아지다 보니 수요가 급증해져서 화장장도 가는 대로 즉시 화장이 쉽지 않다. 그럼으로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발인 날에 장례를 치를 수가 없어 3일장에서 부득이 5일장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아니면 멀리 충청도나 경상도에 있는 화장 적체가 적은 지역 화장장을 찾아가야 한다. 그것도 타 지역이라고 해서 과다한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장례 전문 업체에서는 업체에 가입된 회원들의 차질 없는 장례를 위해 미리 화장장 화구를 여유 있게 독점 예약을 해 둔다. 이런 가수요 현상 때문에 장의 업체에 비 가입 회원들은 정해진 발인 날에 화장이 어렵게 된다. 이 세계에도 수요 공급의 균형이 맞지 않다 보니 이런 현상이 온 것이다. 그 근본 이유는 어느 곳에 화장장을 세우려 하면 그 지역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묘지나 납골당, 화장장, 장례식장 같은 시설을 혐오 시설로 보는 뿌리 깊은 우리들의 의식구조를 하루속히 고쳐야 한다. 따라서 이런 시설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 시설이 내 지역에는 안 된다는 기피증, 이른바 님비(NIMBY)현상은 우리 사회의 큰 병폐이다.
  모처럼 정착되어가는 예약 문화에 지난 친 이기심과 약삭빠른 상술로 인하여 오히려 해독이 될까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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