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무소유의 역리(逆理)

문석흥 2013. 11. 30. 07:31

무소유의 역리(逆理)


  법정 스님은 입적한 후 그분의 유언에 따라 수의도 관도 없이 그리고 장엄한 장례식도 없이 송광사 조계산자락에서 다비(茶毘)함으로써 이승을 떠나셨다. 사리도 수습하지 말라 하였기에 유골만 수습했는데 그나마도 분쇄하여 49재 이후 산골(散骨)한다고 한다.
  법정 스님께서는 어느 사찰의 주시 스님을 하시지도 않았다. 산속 암자에서 홀로 수행  하며 때로는 강연도 하고 봉사 활동도 하셨다. 그리고 탁월한 문장력으로 글을 쓰시고 책을 펴내시는 문필가요, 학자요, 사상가로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신 분이다. 특히 스님이 펴내신 30여 권의 저서 중에 대표작으로 알려진 수필집⟪무소유⟫는 그동안 많은 사람에게 읽혀진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다. 그만큼 무소유는 법정 스님의 나눔과 비움의 정신이요 삶의 모습이다. 이 책이 스님이 입적하시자 서울의 대형 서점에서 모두 품절되었다 한다. 이렇게 구매 열풍이 일자 그동안 스님의 저서를 출판했던 출판사에서 다시 인쇄를 계획했다가 ‘내 저서를 모두 절판시키라’ 라는 유언 때문에 중단 상태라 한다. 법정 스님의 저서가 절판되어 희귀본이 될지 모르는 터에 나는 일찍이 범우사에서 출판한 문고판으로 된 수필집⟪무소유⟫를 한 권 소장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렇다고 법정스님은 무조건 무소유만은 아니었다. 원고료나 출판되는 저서의 인지대는 적지 않은 액수로 스님의 통장에 입금되었지만, 이 돈은 수백 명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모두 지급되었다 한다. 그것도 누구에게 지급되었는지 증서도 기록도 남기지 않고 기억조차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제목의 수필에는. 스님이 ‘다래원’으로 옮겨 왔을 때 어느 스님이 난초 두 분을 보내와서 3년 가까이 정성스레 기르던 이야기가 있다. 장마가 개인 어느 날 봉선사로 운호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갔다가 한낮이 되자 햇볕이 쏟아져 내림을 보고 문득 난초를 밖에 내 놓은 채 나온 것이 생각났다. 지체 없이 허둥지둥 집에 와서 보니 난초 잎이 축 늘어져 있어서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었더니 고개를 들며 살아나더라는 것이다. 이때 온몸으로 마음속으로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절절이 느끼게 되었고 자신이 난초에 너무 집착했음을 알고 이 집착에서 벗어나기로 결심을 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했으며, 밖에 볼 일이 있어 방을 잠시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고, 분을 내 놓고 나갔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 놓고 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집착을 벗어나고자 하던 차에 마침 친구가 왔기에 선뜻 난초 분을 내주고서야  비로소 얽매임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마음이었다고 했다. 이때부터 하루 한 가지씩 버리겠다고 스스로 다짐했고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된 것이 아닐까 라고  스님의 심경을 토로했다. 법정 스님은 이 글 끝에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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