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건릉을 찾아서 화성시 안녕동 화산에는 용주사와 융,건릉이 있다. 융릉(隆陵)은 조선조 제 22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그의 비인 혜경궁 홍 씨가 합장된 능이고, 건릉(健陵)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와 왕비 효의왕후 김 씨가 합장된 능이다. 가을이 한 창 무르익는 이즈음 몇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옛날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갔었던 추억어린 이곳 용주사와 융 건릉을 찾았다. 그 시절, 용주사와 융, 건릉을 소풍갈 때는 기차로 와서 병점역에서 내려 걸어갔었다. 용주사까지 가는 길은 약 2km정도 되는 마차나 다닐 정도의 한가한 비포장 길이었으며 주변엔 논과 밭뿐이었다. 용주사에 거의 이르러서야 안녕동이라는 작은 농촌 마을이 있었고 용주사는 마을을 조금 지나 노송이 욱어진 숲 속에 있었다. 융릉과 건릉은 여기서 다시 5,6km는 더 가야 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 당시 이 일대는 낮인 데도 무서울 정도로 인적이 없고 송림만이 욱어졌던 것으로 기억 된다. 그러나 지금은 용주사와 융, 건릉에 이르는 길은 아스팔트의 넓은 포장도로와 그 주변에는 아파트와 공장 건물들이 숲을 이루고 융, 건릉 앞에는 수원대학교가 있고 대학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했듯이 정조 대왕이 이곳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모실 때 200년 후에 이렇게 변할 줄 상상이나 했었으랴. 그래도 고즈넉한 용주사와 애환서린 말없는 능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사도세자는 당시 노론과 소론의 당파 싸움 속에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 속에 8일 간이나 갇혀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 후에 아버지 영조도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효를 내렸다 한다. 후일에 세손인 정조가 즉위하자 경기도 양주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 곳 화산으로 천장하면서 현능원이라 하고 장헌세자로 추존 하였으며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중건하게 이른 것이다. 그리고 수시로 비명 참사된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는 효성을 보였다. 어느 참배 길에는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 먹는 것을 보고 그 송충이를 잡아 씹어 죽임으로서 능의 송림 관리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는 일화도 있다. 이토록 정조의 지극한 효심 때문에 지금도 이 고장 화성 수원을 효심의 도시로 부름은 바로 예서 기인 된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이곳에 소풍을 다녀와서 작문 시간에 이 능원의 소나무를 주제로 쓴 글이 어린이 잡지에 선발되어 입상한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수필가가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이 유서 깊은 융 ? 건릉과 용주사에서 어린 시절 소풍을 추억하면서 멀어져 가는 이 가을의 길목에 서서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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