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나그네 설음-發

문석흥 2013. 11. 30. 09:54

나그네 설음-發


  서울을 가기 위해 전철역을 향해 나섰다. 역 앞 광장에서 역사로 연결된 통로 가에 할머니 한 분이 생밤을 팔고 있었다. 포장용 상자 몇 장을 펴서 겹쳐 깔고 앉아 생밤을 됫박에 수북이 담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주기만을 기다리며 말없이 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옆에 놓인 자루에 담긴 밤까지 해서 모두 해야 2~3만 원 정도 밖에 될 것 같지 않았다.
  추운 날씨 속에 흔한 연탄 화덕 하나 없이 온몸을 헌 옷가지로 둘러 입고 앉아 오로지 그 밤을 팔기 위해 한 데에서 홀로 고생하는 할머니를 보며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지나가면서도 누구 하나 밤을 사는 사람도 없거니와 시선조차 주는 것 같지 않았다. 하긴 나 역시 그 밤 한 됫박 팔아 줄 마음조차 먹지 않고 그냥 지나쳤으니 말이다.

  전철 안 경로석에 앉아 가노라니 차량 연결 출입문이 열리며 흘러간 옛 노래, ‘나그네 설음’ 가락이 흘러나온다. 허름한 중절모를 눌러 쓴 아래쪽으로 흰머리가 보이고 유행 지난 낡은 오리털 점퍼에 차림의 70대 노인의 허리춤에 매달린 카세트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한 손에는 자주색 플라스틱 제품의 작은 그릇을 들었다. 그릇 안에는 동전 몇 닢이 들어 있었다.
  노인은 이런 모습으로 천천히 차내를 지나갈 뿐, 일일이 승객들 앞에서 적선을 호소하진 않았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지갑에서 1,000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서 그 노인의 그릇에 넣어 주었다. 그러나 나는 본래 이런 때 적선하는 체질은 아니지만, 할머니의 인정 어린 마음씨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 데에서 쭈그리고 앉아 날밤을 팔고 있는 할머니, 전철 안에서 ‘나그네 설음’ 노래 카세트를 틀어가며 적선을 구하는 노인, 양쪽 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나와 비슷한 세대들이다. 둘 다 말로가 복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이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젊어서야 무엇을 하고 살든 살아야 할 날이 많이 남아 있고 젊음과 힘이 있으니 아무렴 어떠하랴. 그러나 늙어서 초라한 모습으로 거리에 나가 좌판 벌이거나 열차 안에서 구걸하는 삶이란 결코 평탄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라고 했는데 그 고생을 늙어서까지 해야 하는가.
  하긴 사람 팔자 알 수 없다고도 한다. 거지가 재벌가가 된 일도 있고 천 석 군이, 만 석 군이 부자가 알거지 신세로 전락한 일도 있다. 이랬든 저랬든 다 자기 타고난 팔자요 운명대로 사는 것, 아무도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일이니 잘살고 못 사는 것 운명으로  돌리는 것이 마음 편할는지 모른다.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는 것도 한 인생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 같다. 대체로 생물은 생태 환경의 영향을 어떻게 받고 적응하느냐에 따라 진화한다는 것은 이미 학설로 정립된 사실이다. 인간도 생물의 한 종이기에 환경 조건에 전혀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두 노인의 모습을 보면서 서울까지 가는 동안 내가 살아온 인생 역정을 더듬어 보았다.
나는 철없던 5살 어린 시절 증조할머니 손에 이끌려 만주에 있는 아버지한테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10살이 되던 해 해방을 맞이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망하니 그 기세등등하던 1등 국민 일본인들이 하루아침에 몰락하여 중국인들에게 참살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거지꼴을 하고 쫓겨 가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 가족들도 보따리를 걸머지고 고향 찾아 만주 땅을 떠나야 했다.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와서 서울 가는 기차를 기다리느라 1주일 이상을 보냈다. 이 기간은 역 앞마당에서 많은 귀향민(당시 전재민이라 했음)이 노숙을 해야 했다. 기차가 정해진 시간에 운행되지 않을뿐더러 정확한 정보도 없어서 평양역 홈에 남쪽으로 향한 열차(화물차)만 들어오면 누가 그랬는지 저 차가 “서울 간다.!” 소리 한 마디에  수많은 귀향민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지붕 위까지 올라타곤 했다. 그러다가 누가 와서 서울 가는 차가 아니라고 하면 모두 내려야 했다. 이렇게 하기를 수 없이 거듭하다가 드디어 서울 가는 회물차를 탔으나 38선을 넘지 못하고 여현이라는 작은 역에 모두 내려야 했다. 여기서 개성까지는 70리, 소련군의 검문을 받으며 걸어서 38선을 넘어 남쪽 땅 개성에 도착했다. 개성역에서 서울역까지는 일반객차가 정상운행이 되어 모처럼만에 여객열차 편으로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는 평양에서 한 때 가족들을 잃어버렸다가 사흘 만에 극적으로 다시 찾게 되었다. 이 사흘 동안 나는 절망 속에서 연일 울며 가족 찾아 평양 거리를 헤매면서 구걸을 하며 보냈다. 그때 끝내 가족을 못 찾았으면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지금의 내가 아니었을 것은 분명한 일이고 북한 땅에서 부모와 고향을 잃은 나그네 신세로 어떤 모습으론가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의 운명이란, 어느 한순간에 결정되는 게 아닌가 한다. 길거리 밤 장수 할머니, 전철 안에서 구걸하는 노인, 이분들도 지나온 세월 속에 어느 한순간 지금의 운명으로 정해지지 않았을까?  
  노인의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던 ‘나그네 설음’의 구슬픈 가락이 내내 귓전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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