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여름 철과 반바지

문석흥 2013. 11. 30. 10:48

여름 철과 반바지                                                         

 

 문    석    흥


  우리나라는 1년 중 4계절이 뚜렷해서 각기 계절마다 특징 있는 기후와 풍광을 느끼며 사는 것도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기후 면으로만 볼 때는 봄과 가을이 제일 좋지만, 여름과 겨울은 기온이 극대 극이라서 봄가을보다는 못한 점이 많다. 특히 올여름과 같이 폭염이 계속되는 여름은 과연 우리나라의 여름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견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좀 춥더라도 겨울이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부자는 겨울이 좋고, 가난한 사람은 여름이 좋다고 했다. 사실 농업이 주산업이었을 그 당시는 물자가 풍족하지도 않을뿐더러 겨울에는 추우므로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사실상 활동이 중단된 상태다. 무엇보다도 겨울을 나기 위한 난방이나 의복이 넉넉지 못했기에 겨울보다는 여름나기가 더 수월했었다.
  특히 여름철에는 춥지 않아 옷은  아무거나 걸치기만 해도 될 정도로 별 부담이 없었다. 지금은 여름철에는 보통 반바지와 반소매 차림이지만, 전에는 반바지는 어른들보다는 주로 어린이나 초등학생들이 많이 입었다. 원래 우리나라에는 반바지가 있지도 않았다. 옛날 바지는 발목에 대님을 매는 정상 바지와 대님을 매지 않고 입는 ‘잠방이’가 있었다. 둘 다 바짓가랑이가 긴 점은 같으나 잠방이는 일 할 때 입는 바지로 대님 없이 걷어서 입었다. 반바지(일본말로는 ‘한즈봉’)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등장하여 일본인들이 입도록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일본인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반바지를 안 입고 왔다고 야단을 맞은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에 그 담임선생님이 한 말이 기억된다. 지금은 일본말을 다 잊어버려서 일본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여름철에 긴 바지를 입는 것은 옷감의 낭비다. 우리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물자를 절약해서 군수품을 만들어 조달해야 한다.”라는 뜻으로 기억된다. 요즘 시골의 할머니들이 편하게 입는 허리에 고무줄 넣은 헐렁한 바지, ‘몸뻬’(일본말)도 그 당시 군수품 조달을 위한 물자절약 맥락에서 나온 제품이다.
  과연 반바지가 일제의 군수품 조달의 목적으로 옷감절약 정책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세월의 변화는 유래야 어찌 되었건 간에 실용적이고 현실 감각에 맞는 미의 창출로 변신한 것이다. 반바지건 긴 바지건 바지는 본래 남성들이 입던 옷인데 요즘은 여성들이 더 애용하는 것 같다. 그 이름도 ‘팬츠(pants)’로 바뀌었다. 우리는 보통 팬츠를 속옷으로 아는데 영어권에서는  바지 종류를 포괄적으로 말하는 모양이다. 요즘 여성들이 입는 아주 짧은 반바지를 핫팬츠라고 부른다. 이렇게 여성들이 입는 반바지도 끊임없이 변신한다.
  강렬한 태양 아래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여성들의 핫팬츠 패션은 멋이 있고 시원해 보인다. 미끈하게 쪽 곧은 그 각선미는 그대로 살아 있는 예술품이 아닌가. 이런 패션이 처음 나왔을 때는 보기에도 민망스럽고 황당한 감이 들었는데 이제는 어디에서나 예사롭게 보다 보니 그런 느낌이 전혀 없이 자연스럽고 그 젊음의 발산이 부럽게 여겨진다.
  세상만사는 보기에 따라, 생각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법, 그래서 요즘 인식의 전환, 발상의 전환이란 말이 나왔나 보다. 올처럼 보기 드물게 뜨거운 여름이건만, 그러나 나는 왠지 예나 지금이나 반바지를 입을 용기가 나질 않아 좀처럼 밖에는 반바지 차림으로 나가질 못한다.
  폭염 속에 이 힘든 여름을 지내며, 반바지를 안 입고 학교에 갔다가 일본인 담임선생님께 야단맞으며 벌벌 떨어야 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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