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올드랭사인’과 ‘찌에호’

문석흥 2013. 11. 30. 10:47

‘올드랭사인’과 ‘찌에호’


                                                            문  석  흥


  늙으면 잠이 없다고 한다. 아니게 아니라 한 밤중에 잠이라도 설치면 다시 잠을 잇기가 몹시 힘들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여 보아야 이불만 들썩였지 좀처럼 잠을 못 이루며 긴 밤이 야속하기만 할 뿐이다.
  이럴 때면 이런 저런 공상도 하고 지난 시절의 추억도 더듬어 보기도 한다. 지난 시절의 추억 속에는 지금도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게 있다.
  내가 군대에서 막 제대를 하고 취직이라기보다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골의 영세한 작은 고등공민학교에 나간 적이 있었다. 학생은 전교생 모두 다 합쳐봐야 100명도 채 안 되고 교직원은 4~5`명 정도인 작은 학교였다. 내가 부임한 날이 마침 졸업식 전 날이라 선생님들과 함께 졸업식 준비를 다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에다 신임교사인 나의 환영을 겸한 회식 모임을 가졌다.
  동네 어느 작은 대폿집에서 5~6명의 교직원이 낡은 술상에 들러 앉아 막걸리잔 이 돌아갔고 돌아가는 술 잔 속에 주기가 오르더니 드디어 젓가락 장단을 치며 유행가도 돌아가며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교감 과 교무주임을 겸직하고 있는 L선생이 많이 취했다. 몸이 약해서인가 주사는 없었는데 혀도 많이 꼬부라지고 몸도 잘 가누질 못했다. 이 바람에 회식은 자연 막을 내리고 L 선생은 근처에 사는 몇 선생님들이 번갈아 가며 업어서 집으로 모셨다.
  다음날 아침 10시, 칸막이 교실을 터서 꾸며 놓은 졸업식장에는 만국기가 느려져 있고 단상에는 태극기와 교기가 세워져 있었고 볼품은 없지만, 화분도 몇 개 놓여 져 그런대로 졸업식장 같은 분위기가 났다. 내빈으로는 학부형 회장님과 부회장님뿐이고 그 밖에 학부형 너 댓 사람 그리고 선생님과 졸업생 25명을 비롯한 재학생 70여 명이 식장 안에 각기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되자 교감인 L 선생님이 사회를 보면서 개식선언을 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에 이어 애국가 제창 순서가 되었다. L 선생은, “다음은 애국가 봉창을 하겠습니다. 제가 첫 소절을 선창을 하겠으니 따라서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고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까지 첫 소절을 선창을 했는데 학생들은 아무도 따라 부르질 않았다. L선생은 다시 한 번 선창을 했는데 이번에는 학생들 속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 이유는 가사는 맞는데 곡은 해방 직후에 영국 가곡 ‘올드랭사인’곡에 가사를 붙여 불렀던 구 애국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 따라 불렀는데 그 분은 나이가 좀 드신 학부형회장님이었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 나서서 수습한 분은 바로 교장선생님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음정이나 박자는 정확하지 않았어도 안익태 선생의 작곡 애국가를 제대로 부르셨기에 그 분의 선창으로 모두 따라 부름으로써 애국가 해프닝은 수습되었다. 워낙 영세한 시골 학교라 피아노는커녕 오르간정도도 없었고 거기다 음악선생마져도 없었으니 이럴 수밖에,
  이어지는 순서에서 학부형 회장의 표창장 수여가 있었다. 좀 전에 L선생을 따라 구 애국가를 유일하게 따라 불렀던 바로 그 학부형 회장이 나와 상장을 들고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 분은 전라도 특유의 사투리 발음으로 “찌에호!, 피오 찌앙 찌앙!” 으로 시작해서 나머지 상장 내용도 사투리 발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역시 학생들 속에서 킥 킥 거리는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해설을 한다면, ‘찌에호’는 상장 발급 번호, 즉, ‘제 00 호’ 이고 ‘피오 찌앙 찌앙’은 ‘표 창 장’이다. 그런데 이 표창장은 발급대장에 등재도 하지 않고 직인만 찍어서 작성했는지 발급번호가 적혀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구태여 ‘제 호’는 읽지 않아도 될 것을 그 학부형 회장은 이런데 대한 상식이 없는 분이라 고지식하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상장 내에 쓰여 있는 글자는 한자도 빼놓지 않고 다 읽은 것이다. 그 후 그 학부형 회장님의 별명이 ‘찌에호’가 되었다.
  나는 그 학교에서 얼마 안 있다가 떠났지만, ‘올드랭사인’ 애국가의 주인공 L선생은 몸도 약한데다 과음으로 해서 일찍 타계했고 ‘찌에호’학부형 회장님도 연로해서 작고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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